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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AL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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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형 작품론] 굿모닝, 미스 몬스터



달팽이 기어다니는 진흙땅에
내 손수 깊은 구덩이를 파리라
물 속의 상어처럼 망각 속에 잠들리라
나는 유서를 꺼리고 무덤을 미워한다
죽어 부질없이 남의 눈을 바라보느니보다
내 차라리 산 채로 까마귀를 불러
더러운 뼈마디를 쪼아 먹게 하리라
- 보들레르 <자화상> 중에서


최운형의 회화는 한 토막 서늘한 농담 같다. 불편하지만 통쾌하고 매우 기묘하면서도 현실에 실제로 있음직한, 그런 신랄한 농담 말이다. '한 여성이 괴물이 되어가는 이야기'라는 몬스터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남성들의 페니스와 그것이 휘두르는 권력을 증오한 나머지 그들의 페니스를 차례로 거세한 후 자신의 수족관에 집어넣으며 이 세상 최악의 페니스들을 수집해간다. 남성에 의한 폭력적인 섹스와 성적인 언어들이 어떻게 한 여성을 괴물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울분과 증오, 저주와 악몽은 생략되고, 대신 그 복수의 방식들이 우스꽝스럽게 펼쳐진다. 주인공은 이 페니스들을 박제시키거나 애완동물처럼 키우기도 하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만큼 그것들을 가해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집어삼켜버리는 거대한 악(惡)에 대해 대처하고 그것을 다뤄내는 작가의 태도는 당혹스럽지만, 묘한 불-쾌감을 안겨준다. 그 불-쾌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가능성을 말하기

아감벤은 언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한다. 언어가 곧 자신의 언어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언어, 자신만의 말을 찾기 위해서는 경험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최운형의 '부서진 언어'는 문법과 표현의 한계라기보다 오히려 작가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의 흔적이다. 이 흔적들은 말해지지 않는 생각의 좌표가 되어 창작의 원천이 된다. 사실 우리는 다양한 배움의 과정을 통해 언어를 숙련시키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언어가 생성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말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성시되는 언어의 탄생, 신화, 권위를 버리고 스스로 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전제된다. 언어(langue)가 말(parole)로 꺽어지는 순간은 담론의 가능성이 배양되는 순간이 된다. 언어를 경험하는 과정에 의해 스스로 언어를 생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최운형의 작업은 이미 주어진 (제도화)된 언어와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주관적 언어태들이 서로 엮이고 부딪히고 겹쳐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 "몬스터"의 "무제"연작은 부서진 언어가 '그리기'를 통해 자신만의 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최운형의 부서진 언어 메모는 일종의 생각 상자가 되어 초기작부터 현재까지 창작의 원천이다. 초기작에서는 시적 문장 자체가 작업의 중심이었지만, (2012)부터 낱말들은 이미지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진화 중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낱말이 뒤로 물러나는 현상을 작가가 기존의 언어에 의존에서 벗어나 회화적 표현으로 확장된다고 해석 가능하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생각 상자에서 퍼온 단상들을 회화적 사건으로 옮기는데 <몬스터>의 경우는 이번 전시로 이야기는 종결된다고 한다. 그러나 의 경우는 여전히 미완 상태이기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다룰 생각이라고 한다.

친절한 복수의 방식 : 거세당한 후의 남성

남성의 페니스를 거세/ 수집/ 재배하는 여성이라는 발상은 프로이트의 거세 콤플렉스(castration complex)와 페니스(남근) 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기발한 비틀기다. 최운형의 회화는 남성에게는 남근기를 거치며 겨우 잠재웠던 거세에 대한 불안, 공포를 상기시키고, 여성에겐 거세공포가 불러일으키는 남근 선망(Penis Envy)과 연결 짓게 만든다. 물론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여성의 남근 선망은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남성의 남근을 거세하여 빼앗으려는 무의식적인 소망의 발현으로, 자신은 갖지 못한 남성 페니스에 대한 결핍감, 남성 페니스가 더 우월하다는 인식, 남성의 능력을 원하는 열등감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운형 회화에서 이 결핍감과 열등감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여성 내부의 생물학적이고 원천적인 결핍에서 오는 피해의식에만 머무르진 않는다. 오히려 남근을 거세하는 주체이자 그것들을 재배(하여 지배)하는 주체로 재-위치시킨다. 여성 자체가 본질적으로 결핍된 존재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비틀어내는 셈이다. 최운형이 그려내는 여성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남성의 페니스에 대한 선망이 아니다. 그리고 원천적인 결핍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포기도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남성들이 누리고 휘두르는 힘과 권력의 폭력에 의해 받는 상처에 대해 더 이상 포기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그녀(들)은 이제 남성에게 복수를 가한다. 남성/외부의 폭력에 의한 상처가 얼마나 한 여성에게 얼마나 깊고 어두운 상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세상과의 단절 끝에 여성은 남성의 오랜 거세 공포를 이용해서 그들을 단죄하는 복수를 택한다. 최운형의 회화 속 그녀는 자신이 몬스터가 되어갈지언정 자신의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다. 마치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주인공 이금자가 택한 것은 용서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가장 친절한 방식으로 자신의 고통을 철저히 앙갚음하는 복수이자 우리 모두를 그 복수로 초대해 그 순간의 공범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최운형의 <몬스터> 시리즈의 가장 친절한 점은 복수, 그 이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녀의 복수는 거세당한 남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된다. 남성들의 페니스를 거세하고 수집해서 사육하거나 박제하는 여성, 그 과정을 통해 그 여성은 몬스터가 되고 결국 여성의 자살로 이야기는 끝난다. 해피 엔딩은 없다. 관객에게 나머지 이야기를 맡기는 오픈 엔딩도 없다. 복수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렇게 자신에 의해 완료되어진다.

산뜻하게 나쁜 여성-되기

"난 나약하지 않다
지금까지 숨 쉬고 있는 걸 보면
쌘 년이 될꺼다.
등에 용 문신을 하고
손으로 못을 박을 거야"
-작가 노트 중에서

'작가 노트'라고 했지만, 사실 확신할 수는 없다. 이것은 작업 노트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의 독백이기도 하고,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씨앗이 되는 작은 이야기들이기도 하고, 한 개 한 개가 독립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치 하이쿠 시 같은 이러한 단문들을 최운형은 끊임없이 써내려 간다. "강해져야 해/ 더 강해져야 해/ 근육을 키워서 바디빌더가 될테다" "톰은 제리를 사랑했다/ 애증의 끝은 그녀의 살점을 뜯어 먹음으로서 완성되는데/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만화가 영원하기를" "씹다가 단물이 빠지면 버려지는 게/ 껌의 인생인거야" "날 괴롭히는 게 재밌니?/ 너 자신을 괴롭혀봐 /그게 더 흥미로운 일이거든."
작가 노트에서도, 몬스터 시리즈에서도 한 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듯한 시니컬한 작가의 태도는 시종일관 유지된다. 남성(혹은 남성이라는 기호)들의 죄악으로 인한 고통, 그들에 대한 증오를 감당해내야 하는 여성(혹은 여성이라는 기호)은 최운형의 회화에서 어떻게 그려지는가. 모욕, 흐느낌, 외침, 탄식, 공포, 눈물, 악몽, 분노, 고독... 최운형은 그 여성을 오랫동안 짓눌렀을 그 모든 종류의 감정들은 그대로 그림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최운형이 그려내는 것은 낫, 절단된 페니스, 담배, 흐르는 피, 정액, 수족관의 물 등의 이미지를 도트무늬와 비비드한 색채, 신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형상들로 그려낸다.
사실 가장 자리가 잘려(crop) 절단된 신체와 분비물의 이미지는 미술사에서 반복되어 온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특히 산업혁명과 상업혁명으로 인해 총체성이 파괴되고 근대적 삶으로의 이행기였던 19세기 예술가들은 이러한 산산조각 나거나 파편화된 신체의 이미지의 재현을 통해 영속적 가치의 붕괴나 요동치는 사회의 심리적, 미학적 변혁들을 반영해왔다. 이후 20세기 중반 여성주의와 신체미술의 흐름 속에서 미술가들이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흥미로운 영역이 된다.
자아의 끊임없는 소외와 상실을 경험해야했던 앞선 예술가들의 상실감과 불안을 최운형 역시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녀의 오랜 유학생활 이후 선보여온 flying shits(2011), 배드 페인팅(2012), 몬스터(2013)로 이어지는 작업들 속에서도 잘 보여진다. 문화적・언어적 장벽에 대한 강박, 문화・인종・성차에 의한 차별 등을 관찰하고 경험해온 예민한 예술가가 이 부조리한 세상에 날릴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는 무엇일까? 가장 나쁜 여성을 만들어내고, 그 여성/몬스터를 가장 산뜻하게 그려내는 일, 그것이 최운형이 선택한 방식이다.
여성 주체가 발현되는 방식에 많은 변화를 이루어내긴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여성이 성녀(마돈나) 혹은 악녀(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강요된다. 이것을 넘어서는 가장 전형적이지만 강인한 미술사의 도상은 유디트다. 자신의 마을을 침략하고 약탈한 아시리아군의 총사령 홀로페리네스에게 접근하며 함께 밤을 보내고 그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를 틈타 그의 목을 베어낸 유디트는 악녀이자 성녀이다. 남성 화가들에 의해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팜므 파탈로 그려졌던 유디트는 20세기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새롭게 발굴되고 해석되었다. 미술사에 가려졌던 16세기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려낸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베어내는 순간의 비장함과 강렬함을 가진 여성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지닌다.(<홀로페리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최운형의 회화 속 그녀도 남성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이기를 거부한다. 나쁜 여성이 될지언정 사회적 편견과 터부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징벌하는 그녀는 또 하나의 유디트가 아닐까. 그래서 몬스터가 된 여성의 무시무시한 복수들은 불쾌하지만, 동시에 유쾌하다. 불-쾌가 공존하는 지대이다.

비열한 세상을 향해 내뱉는 농담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진정성은 찾을 수 없다는 절규와 외침을 위해 최운형은 자신만의 자기만의 작고 단단한 픽션의 그물들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내러티브를 직조해내는 주체로서의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자신의 어떤 일부분을 극대화 시켜 보여준다. 작가에게 생명을 부여받은 캐릭터는 그 자체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최운형에게 몬스터는 나에게서 나온 나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아닌 나이다. 수많은 나아닌 나가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촘촘히 연결되어 언젠가 이 비열한 세상을 덮게 될 것이다. 낡은 것들이 숨죽인 채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아케이드를 산책하면서 덧없는 것들을 숭배했던 보들레르의 우울과 고독, 맹렬한 냉소와 자기 파괴적 환상이 시대를 흘러 도착한 2014년은 19세기와 그리 달리지지 않은 세상이다. 또아리를 틀고 자신의 존재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아가리 앞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비열함과 천박함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진정성과 구원을 갈망할수록 최운형이 빠져드는 것은 소리쳐 세상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고 새로운 픽션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우리 역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넬 것이다. 아주 평화롭고 명랑하게, "굿모닝 미스 몬스터!"

끔찍한 것은 바로 가면을 쓴 그 얼굴들이 그 가면의 야만성과 저속성에 미친 듯이 몰두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밀란 쿤데라 <<농담>> 중에서



여경환 (예술학・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