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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한 인형
최 운 형



1.
심심한 날엔 독백을 해봐.

2.
넌 지금 잠이 오잖아.
아니야.
눈이 감기는데 잠이 오질 않아.
그럼 눈을 감아봐.
뭐가 보이니?
까만 평화
까만 평화가 보여.

소리가 들려
지글지글 끓는 소리
솥에는 뭐가 있는데?
하얀 양
하얀 양 한 마리.
양이 뱀을 토해내고 있어.
그들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영영 친구가 될 수 없을 거야.
양은 뱀이 되고
뱀은 양이 될 테니까.

3.
개가 나를 따라오다가 차에 치어 죽었어.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
난 너무 겁이 나서 뒤돌아보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과자를 사서 집에 왔어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거야.
내가 훌쩍 커 버린 어느 날 소리가 유기 견으로 나에게 찾아왔고
난 그 아이를 위해 살고 있는 것 같아.
잘 돌보다가 보내주려구.
소리와 나는 그렇게 만난거지.

4.
잠깐 눈물이 나려다가 멈춰버리고
또 눈물이 나려다가 멈춰버리고
뭐가 슬픈 거니?
심심해서 슬픈가봐.
심심한 건 슬픈 일이야.
심심한 건 정말 슬픈 일이야.

5.
또 눈이 감겨.
그럼 눈을 감아봐.
이번엔 뭐가 보이니?
배부른 내가 보여.
배가 불러서 좀 불편한 듯해.
연어 스테이크를 먹었거든.
이번엔 배가 불러서 눈이 감기는 구나.
응.
배가 불러서 눈이 감기는 거야.

6.
또 눈물이 나려고 해.
이번엔 뭐가 슬픈 거니?
이번엔 울려고 마음먹으니까 눈물이 나는 거야.
내 의지로 우는 거야.
훌륭한 연기자가 되어 보려구.
훌륭한 연기자가 된다는 건 참 슬픈 일이야.
무엇을 연기하는 거니?
성장한 인형.
난 성장한 인형을 연기하고 싶어.

7.
인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엄마 품에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러면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인형도 엄마 품에서 잠 들 때가 있었니?
응. 오래전 옛날.
절에 있었을 때.
그때 엄마 품에서 잠들었어.
난 편안하게 잘 수 있었지.

8.
절 생활은 어땠니?
그리 좋지만은 않았어.
그 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어.
도망 칠 곳이 없는 거야. 이 세상에는.
왜 도망치려고 하는 거니?
살고 싶으니까
이 거대한 거미줄 같은 세상에서 나도 살고 싶으니까.

이 모든 게 차에 치어 죽은 개와 관련이 있을까?
아니야.
차에 치어 죽은 치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차에 치어 죽은 치타가 있었니?
응.
오래전 옛날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
차에 치어 죽은 치타가 있었어.

9.
이제 그만 일어나.
그만 눈을 떠봐.
연극은 끝났어.
눈물을 닦아.
슬픔에서 벗어나.
음악을 틀어봐.
그리고 스텝을 밟아봐.
하나 둘 하나 둘

연극은 끝났어.
연극은 끝났어.

문을 열어봐.
가을바람을 느껴봐.
핑크빛 세상이 열릴 거야.
그리고 행복한 춤을 추게 될 거야.
핑크빛 세상에서
그이와 손을 잡고
행복한 춤을 추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