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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AL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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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쓰여졌거나 혹은 쓰여지지 않은 저서들에서 내가 항상 반복해서 사유하려 했던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물음이다. 즉 "언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조르주 아감벤, 『유아기와 역사-경험의 파괴와 역사의 근원』, 새물결출판사, 2010, 17쪽


다음의 그림("무제", 2013)을 보자. 또렷한 형상이나 주제를 찾아보기 어렵다. 여러 겹의 망들이 쌓여있지만 깊이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성긴 망 사이로 다른 망들을 엿볼 수 있다. 무작위로 또 다른 그림("무제", 2013)으로 시선을 보내보자. 언뜻 사람의 발 혹은 괴물의 신체 일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거친 붓질과 색채의 대비가 인상적이고 'Crying Donut'이란 문장이 눈에 띤다. '우는 도넛'은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까?

최운형의 회화는 생각이 생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녀의 생각이 반드시 언어적으로 해석되지는 않으며 작가 스스로도 생각을 재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유학 시절, 그녀는 늘지 않는 언어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의 방법론을 숙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늘지 않는다는 것은 사고와 말의 간극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누구나 낱말을 뒤지고 낱말들을 조합해 생각을 형상화한다. 최대한 언어가 생각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누구나 잘 알다시피 이러한 시도는 대개, 아니 거의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사고와 언어표현의 소통이 완벽하게 일어난다면 세상에 이처럼 많은 문학, 미술, 음악, 춤이 존재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최운형은 완벽한 외국어 문장을 만들어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 대신 '부서진 영어'(broken english)로 말해지지 않는 생각을 메모한다. 언뜻 시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이가 쓴 글처럼 읽힐 수도 있다. 함께 생각해보자. 언어가 없는 누군가를. 언어가 없는 사람이 이야기를 가질 수 있을까? 분절된 언어의 조합으로 자신을 표현할 경우, 사람들을 그 사람을 광인이거나 광기에 찬 시인으로 볼 것이다. 이렇게 광인은 탄생한다. 보편성과 일반성이란 이성적 규준은 차이를 생산하는데, 다양성의 가치를 부르짖는 현대사회에서조차 이러한 차이는 잠재적인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된다. 최운형의 작업은 이방인의 경험을 담고 있다. 그녀에게 회화란 이방인의 도피처이자 관습적 언어 밖의 언어로 외치는 저항이다. 알다시피 푸코는 광인의 탄생하는 원인을 찾아 서양의 중세 시대로 되돌아간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광인은 격리의 대상이라기보다 오히려 특별한 능력, 초자연적인 계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광기는 사회적인 관리 대상이 된다. 이성과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으로 대두되면서 광인은 격리 대상으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인도주의적 이념이 자리잡은 현재까지도 광인은 이질적 존재로 여겨진다. 푸코가 주목한 점은 인간의 광기가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제도가 광인을 타자화하는 가에 있다. 최운형이 유학 시절 느꼈던 소통의 장애, 표현의 어려움은 누구가 겪을 수 있는 보편적 경험이지만,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기저에는 언어와 권력 사이의 상관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서진 언어는 잘 못된 언어가 아니라 타자의 언어로 보아야 한다. 예술조차 국가 정책, 문화자본의 일부로 편입된 시대이지만 예술이 여전히 저항일 수 있는 까닭은 제도화된 언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감행되는 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언어로부터 말하기의 불가능성이며, 이는 다시 말하자면 말하기 자체의 잠재력 혹은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조르주 아감벤, 같은 책, 21쪽)

불가능성을 말하기

아감벤은 언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한다. 언어가 곧 자신의 언어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언어, 자신만의 말을 찾기 위해서는 경험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최운형의 '부서진 언어'는 문법과 표현의 한계라기보다 오히려 작가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의 흔적이다. 이 흔적들은 말해지지 않는 생각의 좌표가 되어 창작의 원천이 된다. 사실 우리는 다양한 배움의 과정을 통해 언어를 숙련시키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언어가 생성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말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성시되는 언어의 탄생, 신화, 권위를 버리고 스스로 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전제된다. 언어(langue)가 말(parole)로 꺽어지는 순간은 담론의 가능성이 배양되는 순간이 된다. 언어를 경험하는 과정에 의해 스스로 언어를 생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최운형의 작업은 이미 주어진 (제도화)된 언어와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주관적 언어태들이 서로 엮이고 부딪히고 겹쳐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 "몬스터"의 "무제"연작은 부서진 언어가 '그리기'를 통해 자신만의 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최운형의 부서진 언어 메모는 일종의 생각 상자가 되어 초기작부터 현재까지 창작의 원천이다. 초기작에서는 시적 문장 자체가 작업의 중심이었지만, (2012)부터 낱말들은 이미지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진화 중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낱말이 뒤로 물러나는 현상을 작가가 기존의 언어에 의존에서 벗어나 회화적 표현으로 확장된다고 해석 가능하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생각 상자에서 퍼온 단상들을 회화적 사건으로 옮기는데 <몬스터>의 경우는 이번 전시로 이야기는 종결된다고 한다. 그러나 의 경우는 여전히 미완 상태이기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다룰 생각이라고 한다.

<몬스터> 연작은 사회 전반에 만연된 남성의 폭력, 폭언, 성적 차별을 다루고 있다.

'Mounting'("무제", 2013) 이란 단어가 적힌 작업을 보면 화면 중앙에 거대한 원통이 위치하고 있다. 작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언어 폭력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작가는 그림 그리기 과정을 일종의 허구적 세계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전한다. <몬스터>에서는 "페니스가 가진 힘과 권력 그리고 그 불합리한 역사를 증오하는 정신분열적 여성을 연기하며 페니스들을 거세"(작가의 글)하는 역할을 맡았다. 작품 안에 나열된 낱말이나 언어적 표현 들은 페니스를 비유하는 말처럼 보인다. 'Aquarium'("무제", 2013) 이 적힌 회화는 거세된 성기들을 모아 놓은 수족관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Silly Carrot', 'Crazy Rabbit''Dishes'등의 낱말은 성기를 은유하는 여성적 농담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최운형의 회화는 절대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퍼즐과 같다. <몬스터> 는 출발점이 된 부서진 문장이 회화적 서사로 성장하는 순서에 따라 배치된다. 이 서사를 경험하는 과정은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림과 그림 사이, 그림 속의 형상과 물감 얼룩들 사이, 그림 속에 기입된 낱말과의 맥락을 찾다보면 자연스레 작업 전체에 흐르는 작가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전체를 보기보다 반대로 파편을 보면서 어린아이처럼 전시를 볼 것을 추천한다. 다니엘 아라스(Daniel Arasse)란 프랑스의 미술사가는 고전 회화를 역사로, 이야기로, 의미로 감상하기를 거절하고 아이처럼 작품 가까이에 본능적으로 다가가서 흥미로운 점 하나에 집착하기를 권장한다. 아마도 최운형의 작업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그녀의 작업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퍼즐로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졍현(미술 비평)